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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11.30 [연극 살라메아 시장] 모범시민

공연명연극 살라메아 시장(El alcalde de Zalamea)

공연일시 - 20101120() 오후 4

공연장 원더스페이스 세모극장

캐스트강현식(페드로 크레스포), 김은미(이사벨), 강민재(알바로), 홍달표(후안), 김웅희(레보예도), 김정은(치스파), 이창수(돈 로페), 홍성기(돈 멘도), 이희종(누뇨), 오경아(이네스), 안창용(국왕)

 

17세기 스페인의 극작가 페드로 깔데론 데 라 바르까의 작품 <살라메아 시장>이 국내 초연 중에 있습니다. 깔데론은 스페인 황금시대의 4대 극작가 중 한 사람으로 저 유명한 돈키호테의 세르반테스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극작가이자 시인으로 19세기 독일 낭만파의 열렬한 찬사를 받았으며 괴테는 그를 세익스피어에 견주어 “세익스피어가 포도송이라면, 칼데론은 포도즙이다라고 평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세익스피어가 곧 유럽 고전이라는 등식이 통하는 우리 공연계에서 깔데론은 매우 낯선 이름이지요.

 

 

 

작년 9월 공연된 종교극(성체절의 공연 이벤트로 성찬신비극이라 불렸다는) ‘세상이라는 거대한 연극이 국내 무대에 오른 (<살라메아 시장> 이전까지는) 유일한 깔데론의 작품이었죠. 그나마 2주 간의 짧은 공연이었고 관객들의 무관심 속에 쓸쓸히 막을 내렸는데요. 세상은 신이 제작, 연출하는 거대한 연극 무대이며 그 무대에서 크고 작음에 상관없이 자신의 배역을 충실히 연기하는 것으로 신의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교훈(?)적 내용으로 몇몇 대사들은 곱씹어 볼 철학적 깊이가 있었으나 극이 전반적으로 심심하고 딱딱하게 연출되어 딱히 별다른 재미나 감동을 주지 못했습니다.

 

 

세상이라는 거대한 연극에 비한다면 <살라메아 시장>의 이야기는 꽤나 드라마틱합니다.

 

스페인 국왕의 순조로운 포르투갈 왕위 계승을 위해 이동하던 군대가 국경 부근의 작은 마을 살라메아에 체류하게 되면서 이야기는 시작됩니다. 마을의 존경 받는 부농 페드로의 딸, 이자벨의 미모에 반한 알바로 대위는 그녀를 납치, 강간하기에 이르고 가해자와의 굴욕적인 협상을 통해서라도 자신과 딸의 명예를 되찾으려 하지만 이마저 거절 당한 페드로는 자신의 모든 것을 건 싸움을 시작합니다.

권력의 무법에 대항하여 페드로는 자신 또한 시장이라는 공적 권력의 힘을 빌어 사적인 복수를 빠르고 잔혹하게 마감합니다. 그리고 그 절차 상의 하자가 있다고 한들 그것이 정의를 구현하였다면 무슨 잘못이 있겠느냐고 더 큰 권력에 항변합니다.

 

<살라메아 시장>이자벨의 비극을 기점으로 딱 절반으로 나누어 지는데요. 마치 세익스피어의 희극처럼 말랑말랑한 연애소동으로 진행될 듯 하던 극은 알바로 대위의 연심이 왜곡된 폭력으로 변이되는 순간 권력과 명예, 정의와 복수의 이야기로 빠르게 전환됩니다.

 

 

별다른 재해석 없이 연출되다 보니 세상은 거대한 연극과 마찬가지로 <살라메아 시장> 역시 뜨악스런 부분이 꽤나 많습니다. 언어의 차이는 물론이거니와 바로크 시대 장엄한 무대를 전제로 쓰여졌을 작품이 대학로 소극장 무대에 올려지면서 소거된 미학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도 두 가지 인상적인 효과가 있었습니다. 그 중 한가지는 원작의 모습을 그대로 살리려 하면서 예기치 않게 재미를 준 부분입니다. <살라메아 시장>의 대사는 두 종류입니다. 등장인물간에 주고 받는 고전적 기능의 대사 외에 자신의 속마음을 고스란히 설명하는 일종의 보이스오프(그래도 배우의 입을 통해 들려 주니 보이스오프라긴 그렇지만;)가 그것입니다. 이 넘쳐나는 방백들은 등장인물들의 위선된 속마음을 관객에게 고스란히 설명하면서 의외의 웃음을 유발합니다.

또 하나는 폭행을 당한 이자벨의 심리를 표현한 연출입니다. 이자벨을 강간한 야수적 욕망을 형상화한 말의 모습이 시뻘건 조명에 드러남과 동시에 들리는 히스테릭한 말 울음소리는 이자벨이 겪었을 끔찍한 공포를 효과적으로 전달합니다. (이 장면과 댓구를 이루는 극의 말미, 알바로 대위의 최후 모습도 충격적으로 제시됩니다)

 

이번 <살라메아 시장> 공연은 소개에 무게를 두고 가급적 원형 그대로 연출된 측면이 강해 보입니다. 시공간을 초월한 보편적인 주제가 선명하고 설득력 있게 전개되는 작품이기 때문에 이후 보다 새로운 해석과 현대적 감각으로 연출된다면 많은 관객들의 사랑을 받을 수 있겠단 생각이 드네요.

 

 

사회적 계약에 의한 법과 제도가 그것이 가진 여러 이유의 한계 때문에 정의를 구현하지 못할 때 나아가 그 법과 제도가 권력과 부패와 한편이 되어 정의를 져버릴 때 힘없는 개인은 자신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연극 <살라메아 시장>이 던지는 이 무거운 질문은 사법정의의 신화가 산산조각 난 지금 이 땅에도 더없이 유효한 듯 합니다.

Posted by 다솜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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