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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만화, 공연(뮤지컬, 연극) 등 보고 끄적이는 공간 다솜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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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와 그녀의 사정

- 연극 거미여인의 키스 리뷰 -

 

공연 명: 연극 거미여인의 키스

공연 일시: 2011226() 오후 3

공연장: 아트원씨어터 1

캐스트: 김승대(발렌틴), 박은태(몰리나)

 

 

월드컵 4강의 열기가 식어 가던 2002년 가을, 우연히 로드무비라는 영화를 보았습니다. 주가폭락으로 졸지에 노숙자로 전락한 화이트컬러 펀드매니저가 마초노동자 게이의 도움을 받게 되고 그와 함께 예기치 않은 동행을 하게 되면서 도저히 소통할 수 없을 것 같던 두 사람은 서로를 이해하고 (사랑까지는 아니더라도) 인간적 연민을 느끼게 됩니다.

 

 

소통불가능의 두 사람

 

연극 <거미여인의 키스>는 영화 로드무비와 마찬가지로 소통 불가능해 보였던 두 남자의 이야기입니다.

 

교조적 혁명가 발렌틴과 꿈꾸는 게이 몰리나, 너무도 다른 두 남자가 감옥이라는 특수한 공간에 갇혀 어쩔 수 없는 동거(?)를 하게 됩니다. 발렌틴에게 몰리나는 정치적 계몽이 필요한 (대상으로서의) 억압받는 성소수자일 뿐입니다. 몰리나는 사랑 또한 정치적 행위라고 이야기하는 이상한발렌틴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의 공간에는 오직 그 둘만이 있을 뿐입니다. 서로에게 유일한 두 사람은 싫든 좋든 이야기를 해야 합니다. 다행히 물과 기름 같은 두 사람에게도 공통의 관심사 한가지는 있었습니다. 몰리나는 영화를 좋아하는 발렌틴에게 자신의 로망과 같은 영화 이야기를 매일매일 조금씩 들려 줍니다. 그런 방식으로 몰리나는 자신의 로맨틱한 환상을 유지하고 발렌틴은 고문으로 인한 상처와 고통을 마취합니다.

 

 

두 남자, 영화로 대화하다

 

몰리나가 들려 주는 영화는 캣피플입니다. 우리에게는 나스타샤 킨스키가 주연한 관능적인 호러물(1982)이 유명하지만 극 중 인용되는 캣피플은 자크 투르뇌르 감독의 헐리웃 고전(1942)입니다. 남자와 키스를 하면 표범이 될 것이라는 강박에 빠진 아름다운 여주인공 캐릭터에는 두 사람의 심리 상태(사랑하는 이에게 키스(결국 사랑)를 받고 싶은 몰리나의 욕망과 남자와 키스를 하는 순간 괴물이 될 것이라는 발렌틴의 공포)가 고스란히 투영됩니다.


 

 

흥미로운 건 영화에 대한 두 사람의 상반된 견해입니다. 화자 몰리나는 영화 속 주인공의 의상과 저택의 아름다움을 세세하게 묘사하지만 그런 디테일이 불편하고 지루한 청자 발렌틴은 계속해서 디테일은 빼고!”를 주문합니다. 발렌틴은 정치사회학적으로 텍스트를 분석하려는 반면, 여주인공의 우아함과 아름다움에 도취(동일시)된 몰리나는 사랑에 빠진 여주인공의 심리를 정확하게 묘사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이지나 연출은 몰리나가 꿈꾸듯 이야기를 할 때에는 아름다운 음악으로 낭만을 더하다가 발렌틴의 제지 때면 이 선율을 끊는 것을 반복함으로 서로 다른 두 사람을 표현합니다.

 

 

아름다워서 더욱 슬픈 몰리나

 

계속 평행선을 걸을 것 같던 두 사람의 관계를 바꾸는 것은 몰리나의 여성성입니다. 사실 몰리나는 파시스트의 끄나풀로 발렌틴 조직의 정보를 캐기 위해 그와 같은 방에 투옥된 것이었지만 발렌틴에 대한 연민이 사랑으로 바뀌면서 자신을 희생합니다. 공포에 떨며 제발 너희 조직이야기를 내게 하지 마라고 발렌틴에게 애원하던 몰리나가 자신의 비극적 최후를 예감하면서도 그의 부탁을 들어 주고 마는 것이죠. 발렌틴을 사랑한 몰리나와 달리 발렌틴의 몰리나에 대한 감정은 깊은 인간적 연민 이상으로 발전하지 못한 듯 보입니다. 결국 발렌틴은 몰리나를 안지만 그 행위에는 사랑이 아닌 여러 복잡한 심리가 담겨 있습니다. 몰리나의 죽음을 알게 된 발렌틴의 자책에 찬 회한은 사랑하는 이를 떠나 보낸 슬픔과는 크게 다릅니다.


 

 

안타까운 건 관객들에게 조차 몰리나가 철저히 타자화된다는 점입니다. 이성애자 발렌틴에 동일시된 대부분의 관객들은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동성애자 몰리나를 그저 대상으로만 바라 볼 따름입니다.(, 이는 이성애자인 제 착각 또는 편견일 수도 있습니다) 이로 인해 무대 위 몰리나가 한층 더 외롭지 않았을까 가슴이 시리네요.

 

 

극은 온전하게 발렌틴과 몰리나의 대화로 진행되기에 배우들의 연기가 절대적으로 중요했습니다.

박은태는 자신의 모습 그대로 사랑 받기를 원했지만 항상 거부 당해 온 몰리나의 심리를 멋지게 표현했습니다. 그의 눈빛과 손짓 하나 하나에는 몰리나의 로망과 자존이 자연스레 표출되었고 공포에 떨면서도 사랑이란 환상 속에 희생을 결심하는 연기는 심금을 울렸습니다.

이에 반해 혁명가 발렌틴을 연기한 김승대에게는 아쉬운 점이 많았습니다. 정확한 대사 전달이 미흡했고 여러 차례 대사 처리를 실수하면서 극의 흐름을 끊었습니다. 또한 시종일관하는 그의 화난 듯한 얼굴은 정치적 신념에 대한 믿음과 회의라는 복잡다단한 발렌틴의 심리를 표현하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Posted by 다솜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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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일 - 2010 818() 오후 8

공연장 - 두산아트센터
캐스트 – 송화(이자람), 동호(임태경), 유봉(홍경수), 동호母(이영미), 바니(조영경)



 

1993, 임권택의 서편제

 

군 입대를 한달 정도 앞 둔 1993년 늦은 5월이었을 겁니다. 입대 전에 좋아하는 영화나 실컷 봐야지 하며 온갖 개봉 영화를 섭렵하고 다닐 때였죠. 액션 활극 장군의 아들을 보고 팬이 된 임권택 감독만 믿고 단성사로 향한 저는 제목 참 고답스럽네 생각했던 서편제의 개봉일 조조 티켓 한 장을 손에 들고 극장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얼핏 20% 정도가 찬 객석을 보며 큰 기대는 말아야지, 오늘은 예술적 교양이나 고취해 보자했었는데 상영이 끝나 극장에 불이 들어 왔을 때 저는 주체하지 못 할 감정에 한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조금 지나 진정이 된 후 주변을 둘러 보니 다른 관객들의 사정도 저와 별반 다르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서편제신드롬의 시작이었습니다.

 

임권택 감독의 1993년 작, ‘서편제(임 감독님의 모든 작품이 그러했듯이) 남한 근대화의 역사 속에서 상처받고 부서져 간 패배자들을 아프지만 따스하게 보듬는 작품입니다. ..를 통해 한국인의 한을 제대로 표출했다는 이 영화에 대한 일반의 평가는 지극히 단순한 인상일 뿐입니다. 임권택의 가장 대중적인 걸작, ‘서편제는 분명 한국적인 영상 미학의 정점이라고는 할 수 있지만 소리를 영화적으로 표현하겠다는 그의 예술적 야망은 절반 정도의 성공으로 그치고 말았지요. 사실 영화 서편제에서 관객의 감성을 음악적으로 지배하는 건 득음의 경지에 오른 송화의 소리가 아니라 김수철의 오리지널 스코어입니다. 결국 임권택의 예술적 야심은 이천년대에 들어와서야 춘향뎐을 통하여 성취됩니다.

 

 

2010, 뮤지컬 서편제

 

뮤지컬 <서편제>가 원작 영화와의 경주를 포기한 건 똑똑한 선택이고 또한 당연한 선택입니다. 뮤지컬이란 무대 예술은 영화와는 크게 다른 표현 방식을 가진 예술 장르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편제>는 영화 서편제의 자장에서 완전히 벗어 나지는 못합니다. 또는 의도적으로 영화의 아우라를 끌어 오려 합니다.)



 

<서편제>는 소설(이청준의 단편 청학동 나그네’)과 영화의 서사 일부만을 인상적으로 차용합니다. 그리고 뮤지컬이란 장르에 맞게 재구축을 시도했습니다. 엄지 손가락을 치켜 내울 정도의 대단히 성공적인 시도라고 보긴 어렵지만 그 결과가 가히 나쁘지만은 않습니다. 하지만 한국적이라는 것, 그 정체성을 뮤지컬로 표현하겠다는 것이 이 작품의 목표였다면 그 것에 대한 평가는 좀 더 냉정할 수 밖에 없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서편제>판소리를 소재로 한...입니다. 한국적인 소재와 주제를 담은 대중적인 뮤지컬로서 <서편제>는 나쁘지 않습니다. 아니 꽤 괜찮은 작품입니다. 하지만 우리 소리, 서편제로 표현되는 뮤지컬 작품을 고민하고 이를 성취하고자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랬다면 지금 공연 중인 <서편제>와는 완전히 다른 창조적인 작품이 나왔겠지요 그것이 대단한 성공이든 처참한 실패든 간에.

 

 

시간은 남고 할말은 없고: 서사의 잉여

 

영화와 달리 <서편제>는 송화가 아닌 동호를 중심에 두고 이야기를 풀어 갑니다. 동호는 의붓아비 유봉(더 나아가 유봉의 소리)이 자신의 어머니를 죽였다고 생각합니다.(이후 그의 절절한 사모곡은 뮤지컬 <서편제>의 서사에 있어 중요한 축이 됩니다)

어머니를 두고 유봉과 경쟁했던 어린 동호는 또다시 의붓누이 송화를 두고 아버지 유봉과 경쟁합니다.(유봉은 결국 소리입니다) 결국 동호는 그가 사랑한 두 여인을 유봉(소리)에게 빼앗기고 홀로 떠나 갑니다. 떠나 간 동호는 팝스타로 성공하지만 득음을 위한 수행을 계속하는 송화와 유봉은 변해 가는 세상 속에서 점점 추락해 갑니다.


 

 

얼핏 영화의 스토리와 다를 바 없어 보이지만 생각해 보면 (영화와 달리) 송화와 유봉을 떠난 동호가 팝스타가 된다는 것이 매우 흥미롭습니다. 뮤지컬이기 때문에 동호는 팝스타가 될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사실 서편제의 이야기는 송화의 득음에서 모두 끝난 것입니다. 하지만 뮤지컬 <서편제>는 여기에서 이야기를 끝낼 수가 없습니다. 송화와 동호의 해후까지 남은 시간 동안 계속해서 무언가 볼거리를 관객에게 제공해야 합니다. 결국 동호는 (물론 우리 소리의 대척점에 있는 대중음악을 한다는 명분도 있지만 그 보다는 좀더 기능적인 필요에 의해) 팝스타가 되어야만 하고 계속해서 송화를 그리워하는 애절한 넘버를 부르고 불러야만 하는 것이죠.

이것이 뮤지컬 <서편제>의 딜레마입니다. 할 말 다한 인기 드라마의 연장 방송이 지루하기 짝이 없듯이 <서편제> 2부는 사족에 불과합니다. 그 중에서도 클럽 테크노 씬은 정말이지 볼썽사나운 이해하기 어려운 장면입니다. 시대와 전혀 맞지 않는 테크노 음악은 윤일상과 합작한 이지나 연출의 파격으로 친다 하더라도 클럽 한 켠에 요상한 의상을 입힌 송화를 세워 둔 것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앞서 <서편제>가 적극적으로 영화의 아우라를 끌어 온 부분이 있다고 했는데요. 바로 저 유명한 진도아리랑롱테이크 장면과 송화와 동호의 재회 장면이 대표적입니다.


 

 

특히 송화와 동호의 재회 장면이 특별했습니다. 영화에서 송화와 동호가 재회 모습은 마치 운우의 정을 나누는 듯 두 사람의 소리와 북이 어우러졌다고 표현됩니다. 사실 영화에서는 득음한 송화의 노래가 동호의 북과 어우러지는 것을 들을 수 없습니다. 대신 송화와 동호의 얼굴 클로즈업을 연속 교차 편집하면서 김수철의 애잔한 스코어를 들려 줍니다. 임권택 감독은 도저히 득음의 경지를 표현할 길이 없어 그럴 수 밖에 없었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


 

 

이 장면을 뮤지컬 <서편제>은 마주 앉은 두 사람의 실제 합주를 들려 주면서 두 사람의 감정이 고조되는 것을 조명으로 표현합니다. 결국 무대를 가득 채워 송화와 동호를 감싸는 환하고 따듯한 빛이 기어이 관객들을 울리고 맙니다. <서편제>의 단 하나의 장면을 꼽으라면 두말 할 나위 없이 이 장면입니다. (이에 못지 않은 장면은 송화의 백발가를 들으며 떠나 가는 유봉의 죽음입니다. 영화에서 없었던 이 장면은 환상처럼 등장하는 동호母 때문에 더욱 기억에 남습니다)

 

 

뮤지컬 작곡가 윤일상

 

미니멀한 무대 미술은 탁월했습니다. 흰색을 컨셉으로 오브제를 최소화한 무대는 비움의 미학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보여 주었고 따듯한 느낌의 조명과도 조화를 잘 이뤘습니다. 하늘하늘 날리는 한지 모자이크 칸막이는 그 자체로 아름다울 뿐 아니라 배우들의 동선을 정리하는 기능적 역할에도 충실했습니다. , 좌석(사이드)에 따라 칸막이로 인해 시야가 제한되는 점은 어떻게든 풀어야 할 숙제라고 생각됩니다.

 

이지나 연출은 인터뷰를 통해 뮤지컬 <서편제>에서 가장 중점을 두고 있는 요소로 음악을 꼽은 바 있습니다. 그녀는 가요계의 마이다스, 윤일상에게 작곡을 맡김으로써 관객의 정서적 몰입을 최대치로 끌어내는 동시에 국악계의 어린 뮤즈, 이자람을 합류시켜 소재로서의 우리 소리를 공고히 하려 시도했습니다. 국악을 믹스한 윤일상의 다양한 크로스 퓨전 넘버들은 듣는 순간 귀에 착착 붙는 맛은 넘쳐 났지만 그만큼 휘발성이 강한 약점이 있습니다. (공연을 본 지 이틀 정도 지난 시점에서 <서편제>의 모든 넘버가 기억 속에 흐릿해지더군요) 그리고 지나친 판단일지 모르겠지만 이자람 씨의 경우는 그저 이 작품의 소재주의에 소비되어 버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 작품 음악의 어떤 부분에서 그녀의 재능이 발휘된 것인지 쉽게 찾아 볼 수가 없네요. (배우로서의 이자람은 물론 다른 평가를 받아야 합니다. 그녀의 송화는 오정해의 신화적 송화만큼은 아니더라도 그 처연함과 소리에 대한 굳은 의지의 표현만큼은 모자람이 없었으며 몇 장면에서는 전율이 일 정도였습니다)

 

아름다운 스토리와 이자람의 빼어 난 연기, 그리고 비범과 파격을 넘나 드는 흥미로운 연출 등 분명 <서편제>는 대중 뮤지컬 작품으로 단점보다 미덕이 훨씬 많은 작품입니다.

하지만 이 작품이 의도한 한국적뮤지컬이라는 지향에 대한 평가를 하자면 고개를 갸웃거릴 수 밖에 없게 됩니다.

Posted by 다솜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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