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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1.01.25 [연극 트루웨스트] 형이 돌아왔다

공연명연극 트루웨스트

공연일시 - 2010129() 오후 8

공연장 컬쳐스페이스 엔유

캐스트김태향(), 이율(오스틴), 임진순(사울키머/어머니)

제목형이 돌아왔다

 

 

무대에 빛이 들어 오고 연극이 시작되면 두 명의 젊은 사내가 눈에 들어 옵니다. 말쑥한 차림의 한 남자는 타자기를 앞에 두고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고 지저분한 장발에 가죽 자켓 차림을 한 다른 한 명은 소파에 누워 부산을 떨고 있습니다. 가죽 자켓과 타자기 간에 대화가 시작되면서 관객들은 이 이질적인 두 남자가 형제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말쑥한 차림의 동생 오스틴은 아이비리그 출신의 인텔리 극작가이며 척 보기에도 터프한 마초 스타일의 리는 의심쩍은 사막생활에서 막 돌아 온 오스틴의 형입니다. 분명 오랫동안 떨어져 지낸 형제간의 해후로 보이건만 둘 사이에는 상봉의 반가움은 고사하고 어색함을 넘어선 건조함, 그리고 왠지 모를 긴장감까지 느껴집니다. 도대체 두 형제에게는 어떤 사연이 있었고 또 어떤 일이 벌어지려는 걸까요?

 

빔 벤더스의 1984년 영화 파리,텍사스의 극작가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극작가 샘 세퍼트는 연극 <트루웨스트>에서 이질적인 두 형제의 갈등 속에 당대 미국사회 내면의 황량함을 고스란히 투사하고 있습니다.(그리고 이제 이 황량한 풍경은 우리에게도 그다지 낯설지 않습니다)

 

 

 

역할 바꾸기

 

오랫동안 준비했던 자신의 시나리오로 헐리우드에서의 성공을 목전에 두고 있던 오스틴은 자신의 시나리오가 형, 리의 허접한 이야기에 밀려 폐기 처분에 이르자 거의 돌아 버릴 지경입니다. 그때까지 형의 언어, 물리적 폭력을 감내하며 형에 대한 최소한의 매너를 잃지 않던 그는 바로 이 한 순간에 정신줄을 놓아 버립니다. 그 순간에 오스틴은 지금까지의 자신의 삶과 그 삶의 토대가 되었던 세계로부터 매몰찬 배신을 경험하고 본질적인 외로움, 공허함을 느낀 것입니다.


 

 

믿음이 무너진 인간은 약해질 수 밖에 없습니다.

 

오스틴이 자신의 세계로부터 당한 (반대로 리가 별다른 노력 없이 오스틴의 세계로 유유히 입성하는) 순간부터 <트루웨스트>은 본격적으로 흥미로워집니다.

 

오스틴은 자신을 버린 문명 세계에 복수라도 하듯 무질서한 폭주를 거듭하고, 반면에 리는 세상 안에서의 성공이라는 천금 같은 찬스를 꽉 붙잡기 위하여 최선의 노력을 경주합니다. 두 형제의 역할 바꾸기, 특히 허물어진 오스틴의 어이없는 행동(극 초반에 리의 모습과 완전히 똑같은!!)은 폭소를 자아내는 한편, 이를 보는 이의 마음 한 켠에 불편함을 심기 시작합니다.

 

결국 무질서와 야만 그리고 폭력의 삶을 살아 온 형, 리의 귀환은 조화롭고 안정된 문명 세계의 모범적 일원이던 동생 오스틴을 자극시켜 그의 내면 깊숙이 도사리고 있던 극단적 폭력성을 폭발시키고 맙니다.

 

 

따로 또 같이

 

<트루웨스트> 속 주인공 가족은 모두 떨어져 살고 있습니다. 리와 오스틴 형제뿐 아니라 그들의 아버지와 어머니도 모두 뿔뿔이 흩어져 산지 오래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출가하여 새로운 일가를 이룬 오스틴은 자신의 아내, 자식들과도 떨어져 지내고 있습니다. 인간의 가장 본질적 공동체 단위인 가족이 완전히 해체된 것이죠.

그런데 트루웨스트에서 가장 놀라운 것은 흩어졌던 가족이 함께 한 순간에 최대의 비극이 일어난다는 겁니다. 리와 오스틴 형제의 갈등이 극에 달한 시점, 돌아 온 어머니의 존재는 형제간 살인이라는 끔찍한 비극의 방아쇠가 됩니다. 어머니에 의해 형제간 갈등이 봉합될 것이라는 상식적인 예측, 기대와 달리 그녀는 자신의 자식들에게 아무런 애정과 관심도 없습니다. 결국 오스틴의 신경증은 극한으로 치닫고 그는 형의 목을 조이고 맙니다.

극 중반, 리와 오스틴은 이미 '형이 동생을 죽이고 아들이 부모를 죽이는 폭력이 일상화된 미국 사회를 아무렇지도 않게 이야기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현실은 어느덧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에서도 이제 그다지 낯설지 않은 풍경이 되어 가고 있습니다.

 

 

리얼 난투 블랙코미디

 

김태향과 이율. 트루웨스트의 두 배우에게 진심 어린 박수를 보냅니다. 두 시간 내내 육체적, 심리적으로 격렬하게 부딪히는 두 배우를 보며 혹시나 무대 위에 탈진하여 쓰러지는 것은 아닌지 마른 침을 삼키며 걱정했습니다.

예측 못 할 감정의 변화 속에 긴장과 이완을 오간 김태향 씨의 연기도 훌륭했지만, 이율 씨의 극 중반 이후 허물어진 오스틴 연기는 진정 빼어났습니다. 특히 극 초반의 말쑥한 이미지의 오스틴과 대비되어 더욱 큰 인상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임진순 씨. 헐리우드 제작자, 사울의 뺀질한 여피 모습도 훌륭했지만 극 말미에 보여 준 무표정한 어머니 연기는 장면을 압도하기에 충분했습니다.


 

 

연극 <트루웨스트>는 여러 겹의 이야기와 주제를 담고 있지만 이번 공연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가족의 복원을 통한 인간 본성의 회복에 대한 소망이었습니다. 셈 세퍼트는 블랙코미디의 형식을 빌려 이 끔찍한 비극을 있을 수 있는 이야기로 설득력 있게 제시하면서 역설적으로 가족의 복원을 웅변하고 있습니다.


Posted by 다솜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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