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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만화, 공연(뮤지컬, 연극) 등 보고 끄적이는 공간 다솜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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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일 - 2010 818() 오후 8

공연장 - 두산아트센터
캐스트 – 송화(이자람), 동호(임태경), 유봉(홍경수), 동호母(이영미), 바니(조영경)



 

1993, 임권택의 서편제

 

군 입대를 한달 정도 앞 둔 1993년 늦은 5월이었을 겁니다. 입대 전에 좋아하는 영화나 실컷 봐야지 하며 온갖 개봉 영화를 섭렵하고 다닐 때였죠. 액션 활극 장군의 아들을 보고 팬이 된 임권택 감독만 믿고 단성사로 향한 저는 제목 참 고답스럽네 생각했던 서편제의 개봉일 조조 티켓 한 장을 손에 들고 극장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얼핏 20% 정도가 찬 객석을 보며 큰 기대는 말아야지, 오늘은 예술적 교양이나 고취해 보자했었는데 상영이 끝나 극장에 불이 들어 왔을 때 저는 주체하지 못 할 감정에 한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조금 지나 진정이 된 후 주변을 둘러 보니 다른 관객들의 사정도 저와 별반 다르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서편제신드롬의 시작이었습니다.

 

임권택 감독의 1993년 작, ‘서편제(임 감독님의 모든 작품이 그러했듯이) 남한 근대화의 역사 속에서 상처받고 부서져 간 패배자들을 아프지만 따스하게 보듬는 작품입니다. ..를 통해 한국인의 한을 제대로 표출했다는 이 영화에 대한 일반의 평가는 지극히 단순한 인상일 뿐입니다. 임권택의 가장 대중적인 걸작, ‘서편제는 분명 한국적인 영상 미학의 정점이라고는 할 수 있지만 소리를 영화적으로 표현하겠다는 그의 예술적 야망은 절반 정도의 성공으로 그치고 말았지요. 사실 영화 서편제에서 관객의 감성을 음악적으로 지배하는 건 득음의 경지에 오른 송화의 소리가 아니라 김수철의 오리지널 스코어입니다. 결국 임권택의 예술적 야심은 이천년대에 들어와서야 춘향뎐을 통하여 성취됩니다.

 

 

2010, 뮤지컬 서편제

 

뮤지컬 <서편제>가 원작 영화와의 경주를 포기한 건 똑똑한 선택이고 또한 당연한 선택입니다. 뮤지컬이란 무대 예술은 영화와는 크게 다른 표현 방식을 가진 예술 장르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편제>는 영화 서편제의 자장에서 완전히 벗어 나지는 못합니다. 또는 의도적으로 영화의 아우라를 끌어 오려 합니다.)



 

<서편제>는 소설(이청준의 단편 청학동 나그네’)과 영화의 서사 일부만을 인상적으로 차용합니다. 그리고 뮤지컬이란 장르에 맞게 재구축을 시도했습니다. 엄지 손가락을 치켜 내울 정도의 대단히 성공적인 시도라고 보긴 어렵지만 그 결과가 가히 나쁘지만은 않습니다. 하지만 한국적이라는 것, 그 정체성을 뮤지컬로 표현하겠다는 것이 이 작품의 목표였다면 그 것에 대한 평가는 좀 더 냉정할 수 밖에 없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서편제>판소리를 소재로 한...입니다. 한국적인 소재와 주제를 담은 대중적인 뮤지컬로서 <서편제>는 나쁘지 않습니다. 아니 꽤 괜찮은 작품입니다. 하지만 우리 소리, 서편제로 표현되는 뮤지컬 작품을 고민하고 이를 성취하고자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랬다면 지금 공연 중인 <서편제>와는 완전히 다른 창조적인 작품이 나왔겠지요 그것이 대단한 성공이든 처참한 실패든 간에.

 

 

시간은 남고 할말은 없고: 서사의 잉여

 

영화와 달리 <서편제>는 송화가 아닌 동호를 중심에 두고 이야기를 풀어 갑니다. 동호는 의붓아비 유봉(더 나아가 유봉의 소리)이 자신의 어머니를 죽였다고 생각합니다.(이후 그의 절절한 사모곡은 뮤지컬 <서편제>의 서사에 있어 중요한 축이 됩니다)

어머니를 두고 유봉과 경쟁했던 어린 동호는 또다시 의붓누이 송화를 두고 아버지 유봉과 경쟁합니다.(유봉은 결국 소리입니다) 결국 동호는 그가 사랑한 두 여인을 유봉(소리)에게 빼앗기고 홀로 떠나 갑니다. 떠나 간 동호는 팝스타로 성공하지만 득음을 위한 수행을 계속하는 송화와 유봉은 변해 가는 세상 속에서 점점 추락해 갑니다.


 

 

얼핏 영화의 스토리와 다를 바 없어 보이지만 생각해 보면 (영화와 달리) 송화와 유봉을 떠난 동호가 팝스타가 된다는 것이 매우 흥미롭습니다. 뮤지컬이기 때문에 동호는 팝스타가 될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사실 서편제의 이야기는 송화의 득음에서 모두 끝난 것입니다. 하지만 뮤지컬 <서편제>는 여기에서 이야기를 끝낼 수가 없습니다. 송화와 동호의 해후까지 남은 시간 동안 계속해서 무언가 볼거리를 관객에게 제공해야 합니다. 결국 동호는 (물론 우리 소리의 대척점에 있는 대중음악을 한다는 명분도 있지만 그 보다는 좀더 기능적인 필요에 의해) 팝스타가 되어야만 하고 계속해서 송화를 그리워하는 애절한 넘버를 부르고 불러야만 하는 것이죠.

이것이 뮤지컬 <서편제>의 딜레마입니다. 할 말 다한 인기 드라마의 연장 방송이 지루하기 짝이 없듯이 <서편제> 2부는 사족에 불과합니다. 그 중에서도 클럽 테크노 씬은 정말이지 볼썽사나운 이해하기 어려운 장면입니다. 시대와 전혀 맞지 않는 테크노 음악은 윤일상과 합작한 이지나 연출의 파격으로 친다 하더라도 클럽 한 켠에 요상한 의상을 입힌 송화를 세워 둔 것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앞서 <서편제>가 적극적으로 영화의 아우라를 끌어 온 부분이 있다고 했는데요. 바로 저 유명한 진도아리랑롱테이크 장면과 송화와 동호의 재회 장면이 대표적입니다.


 

 

특히 송화와 동호의 재회 장면이 특별했습니다. 영화에서 송화와 동호가 재회 모습은 마치 운우의 정을 나누는 듯 두 사람의 소리와 북이 어우러졌다고 표현됩니다. 사실 영화에서는 득음한 송화의 노래가 동호의 북과 어우러지는 것을 들을 수 없습니다. 대신 송화와 동호의 얼굴 클로즈업을 연속 교차 편집하면서 김수철의 애잔한 스코어를 들려 줍니다. 임권택 감독은 도저히 득음의 경지를 표현할 길이 없어 그럴 수 밖에 없었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


 

 

이 장면을 뮤지컬 <서편제>은 마주 앉은 두 사람의 실제 합주를 들려 주면서 두 사람의 감정이 고조되는 것을 조명으로 표현합니다. 결국 무대를 가득 채워 송화와 동호를 감싸는 환하고 따듯한 빛이 기어이 관객들을 울리고 맙니다. <서편제>의 단 하나의 장면을 꼽으라면 두말 할 나위 없이 이 장면입니다. (이에 못지 않은 장면은 송화의 백발가를 들으며 떠나 가는 유봉의 죽음입니다. 영화에서 없었던 이 장면은 환상처럼 등장하는 동호母 때문에 더욱 기억에 남습니다)

 

 

뮤지컬 작곡가 윤일상

 

미니멀한 무대 미술은 탁월했습니다. 흰색을 컨셉으로 오브제를 최소화한 무대는 비움의 미학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보여 주었고 따듯한 느낌의 조명과도 조화를 잘 이뤘습니다. 하늘하늘 날리는 한지 모자이크 칸막이는 그 자체로 아름다울 뿐 아니라 배우들의 동선을 정리하는 기능적 역할에도 충실했습니다. , 좌석(사이드)에 따라 칸막이로 인해 시야가 제한되는 점은 어떻게든 풀어야 할 숙제라고 생각됩니다.

 

이지나 연출은 인터뷰를 통해 뮤지컬 <서편제>에서 가장 중점을 두고 있는 요소로 음악을 꼽은 바 있습니다. 그녀는 가요계의 마이다스, 윤일상에게 작곡을 맡김으로써 관객의 정서적 몰입을 최대치로 끌어내는 동시에 국악계의 어린 뮤즈, 이자람을 합류시켜 소재로서의 우리 소리를 공고히 하려 시도했습니다. 국악을 믹스한 윤일상의 다양한 크로스 퓨전 넘버들은 듣는 순간 귀에 착착 붙는 맛은 넘쳐 났지만 그만큼 휘발성이 강한 약점이 있습니다. (공연을 본 지 이틀 정도 지난 시점에서 <서편제>의 모든 넘버가 기억 속에 흐릿해지더군요) 그리고 지나친 판단일지 모르겠지만 이자람 씨의 경우는 그저 이 작품의 소재주의에 소비되어 버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 작품 음악의 어떤 부분에서 그녀의 재능이 발휘된 것인지 쉽게 찾아 볼 수가 없네요. (배우로서의 이자람은 물론 다른 평가를 받아야 합니다. 그녀의 송화는 오정해의 신화적 송화만큼은 아니더라도 그 처연함과 소리에 대한 굳은 의지의 표현만큼은 모자람이 없었으며 몇 장면에서는 전율이 일 정도였습니다)

 

아름다운 스토리와 이자람의 빼어 난 연기, 그리고 비범과 파격을 넘나 드는 흥미로운 연출 등 분명 <서편제>는 대중 뮤지컬 작품으로 단점보다 미덕이 훨씬 많은 작품입니다.

하지만 이 작품이 의도한 한국적뮤지컬이라는 지향에 대한 평가를 하자면 고개를 갸웃거릴 수 밖에 없게 됩니다.

Posted by 다솜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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